권용일은 충북 제천 출신으로 1907년 의병에 투신하여 이강년 의진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갈평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린 후, 전략의 필요성을 느끼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그는 광복 전까지 정경노라는 이름으로 망명 생활을 하였고, 1963년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이명
淸隱(號)
성별
남성
본적지
충청북도 제천
생몰 연월일
1884-05-11 ~ 1971-09-05
운동계열
의병
포상
독립장 (1963)
활동정보
충북 제천(忠北 堤川) 출신으로 청풍(淸風)에서 살았고, 본은 안동(安東)이다.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에 투신하여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가담하여 처음에는 우군선봉(右軍先鋒), 후에는 도선봉(都先鋒)으로서 청풍과 충주(忠州)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6월 권용일은 원주(原州) 길에서 이강년을 처음 만났다. 이 때 이강년은 제천(堤川)으로 가다가 오석(烏石)에서 '윤기영(尹基榮)이 평창(平昌)으로 들어가 적 2명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서 원주 병영의 무기를 거두려고 종사(從事) 11인을 거느리고 원주로 가던 길이었다. 권용일은 국사가 이미 기울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하여 서울에서 내려오던 길이었다. 이들은 밤에 대평교(大平橋)로 들어가 윤기영을 만나 상세한 사정을 듣고 원주읍으로 들어가서 군기(軍旗)를 거두고 군대를 소모(召募)하였는데 무기는 독전장(督戰將) 이만원(李萬源)과 권용일이 배양산(培陽山)의 은밀한 곳에다 묻어 두었다. 7월 30일 권용일은 이강년의 명령을 받아 이만원과 함께 원주에 묻어 두었던 탄환을 다시 찾으러 떠났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제천 송수곡(松首谷)에서 1부대의 적을 만났으나 피하고, 또 청풍 후평(後坪)에서 순검 3인을 만났으나 또 잘 피하여 무사히 본진에 도착하니 온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그들을 칭찬하였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권용일은 우군선봉장, 그리고 이만원은 도총독장(都總督將)으로 임명된 것이다. 이 때 이강년 의진의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중 군 장 김상태(金尙台) 우군선봉 권용일(權用佾) 도총독장 이만원(李萬源) 전 군 장 윤기영(尹基榮) 우 선 봉 백남규(白南奎) 후 군 장 신태원(申泰元) 도 선 봉 하한서(河漢瑞) 우 군 장 이중봉(李重鳳) 후 군 장 정연철(鄭淵 )
1908년 8월 갈평(葛坪)으로 가서 적을 쳐부수고 총과 탄환 투구 등을 수없이 노획하였다. 처음 이 전투는 김현규(金賢圭)와 조동규 등이 갈평에서 적을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이를 보고 받은 이강년은 그들을 구하고자 군대를 파견했다. 우선봉 백남규로 하여금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갈평 남산으로 올라가게 하고, 그리고 우군선봉장 권용일은 수백 명을 거느리고 동산으로 올라갔다. 한편 총독장 이만원은 중앙으로 쳐들어갔다. 적들은 김현규와 조동규가 패하여 달아난 것만을 믿고 이강년 의진의 대군이 포위 습격하는 것을 모르고 마음놓고 휴식하다가 습격을 받고는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 일대에 죽어 넘어진 시체가 산과 들에 가득 찼다고 한 것을 미루어 보아 당시의 격전상을 알 수 있겠다. 마을 사람들도 달아나는 적을 맨손으로 잡았으며, 각기 밥 광주리와 술병을 들고 나와 군사들을 대접하며 위로하는데 해가 저물고 밖이 어두워져서야 적의 유류품들을 거두어 용연(龍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밖에 8월에 있었던 주요 전투를 차례로 살펴보면, 문경 모항령(毛項嶺) 갈평(葛坪) 문경 대성사(大成寺) 문경 적성(赤城) 단양 유치(丹陽 楡峙) 영월(寧越) 덕포독산(德浦獨山) 등이다. 이러한 전투가 1908년 6월까지 꾸준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강년이 체포되고 기타 지역에서도 의병운동의 한계성이 드러나게 되자 권용일은 새로운 전략의 필요성을 느끼고 만주에서의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어야 함을 절감하였다. 이에 전 승지 김규오(金奎奧) 이범구(李範九) 김규철(金奎澈)과 함께 모의하고, 고종에게서 원세개(袁世凱)에의 청병조서(請兵詔書)를 받아 출국하였다. 그러나 출국 중에 발각되어 위의 3인은 체포되고 권용일 만이 홀로 망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후 광복될 때까지 정경노(鄭敬老)라고 변성명하고 망명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