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론이 적극 대두되었으며, 모든 재만 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지 하에 70여 개의 독립군부대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교란시키는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이 두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에 밀린 독립군은 소련·연해주 등지를 전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유시참변 이후 독립군 세력들은 다시 만주로 돌아와 항일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구태는 이러한 시점인 1922년 7월 군정서(軍政署) 의용대 토벌대장이 중요한 임무를 띠고 모지(某地)로 출동할 때 길안내자로 동행하였다가, 평북 자성군(慈城郡) 대안(對岸) 삼도구(三道溝)에서 일경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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