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부친이 운영하는 한학서숙에서 배우다가 남명학교(南明學校)와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 공부한 뒤 경주 부자 최준의 도움을 받으며 대구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서울로 올라가 중앙고보에 적을 두기도 하였으나,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중도에 그만둔 채, 1918년 광주에 내려가 전라남도 도청 고용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이때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만세시위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6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1919년 말 안동으로 돌아온 그는 원흥학술강습소(元興學術講習所), 일직서숙(一直書塾), 오릉의숙(五陵義塾) 등을 창설하며 교육운동에 매진하는 한편, 안동청년회(安東靑年會), 일직금주회(一直禁酒會) 등을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1922년경 동향 출신의 민족운동가 김재봉(金在鳳), 이준태(李準泰), 김남수(金南洙) 등과 교유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 그는 1923년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를 조직하며 농민운동에 진력하였다. 풍산소작인회는 회원이 5천명에 달하는 국내 유수의 농민운동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의결기관인 총회와 집행기관인 집행위원회 체계를 갖추고 각 면 단위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각 동에는 다시 통대를 두어 마을을 반 단위로 조직하는 등 견고한 조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창립총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조선노농총동맹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하였다. 이때 그는 인쇄직공조합과 철공조합 등 각 방면 노동조합 결성에도 앞장서 활동하는 한편, 동년 6월 일제의 언론 집회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언론집회압박탄핵회(言論集會壓迫彈劾會)에서 동회의 방침을 결정하는 위원으로 선임되어 결의문을 작성하는 등 언론투쟁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조선노농총동맹을 이끌면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결성에도 깊게 관여하였다. 1925년 2월 김찬(金燦), 김재봉, 김단야, 박헌영 등과 조선공산당 창당을 결의하고 동년 4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과 그 산하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가 창설되자 고려공산청년회 조직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해 말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이때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들어오는 자금을 관리하며 조직을 총괄하는 한편, 6.10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는 융희황제 승하 직후인 4월 말경부터 상해의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인사들과 함께 6·10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만세운동의 투쟁지도부인 6.10투쟁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책임을 맡았다. 그가 책임자가 된 것은 그가 대중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의 중진 인물이자, 학생운동계의 중심적 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도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만세운동을 3.1운동 때와 같이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학생계의 혁명적 인사들을 망라한 통일전선체로서 대한독립당 조직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6.10만세운동에는 국외의 임시정부, 병인의용대,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등이, 국내의 조선공산당·천도교 구파·조선노농총동맹, 그리고 학생계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이 폭넓게 연대를 이룰 수 있었다.
권오설과 관계자들은 격문의 지방 배포와 지방조직과의 연락을 위해 두 가지 방책을 세워놓고 있었다. 격문은 지방의『조선일보』지사·『개벽』지사·소비자조합·천도교 교구·기타 청년단체 등 전국 각처에 발송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격문의 송달 방법은『개벽』·『신민』·『신여성』 등의 잡지에 격문 약간 매를 끼워 보낼 계획이었다. 또한 각 지역의 만세운동을 추동하기 위해 책임자를 선정하여 파견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전국을 철도선에 의해, 호남선·경부선·경의선·경원선 방면 등 4개 지역으로 나누고, 박래원(朴來源)을 호남선 방면과 경부선 방면의 중심지인 대전에 민창식(閔昌植)을 경의선(京義線) 방면의 중심지인 사리원(沙里院)이나 경원선 방면의 중심지인 원산(元山)에 파견하여 만세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다는 구체적 계획도 세워 놓았다. 그리고 서울 시가지에는 6월 8일 밤을 기해 격문을 배포할 계획이었다.
그는 만세시위 때 사용하기 위한 격고문과 그 밖의 전단 등을 직접 작성하였다. 당시 그가 작성한 격고문을 살펴보면, 총체적으로 식민지 민족을 무산자계급,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계급으로 규정하면서 민족적·정치적 해방과 계급적·경제적 해방을 동일한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결국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분리된 것이 아닌 통일적인 것으로 파악한 그의 성숙한 민족해방이론은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민족혁명을 위해 자유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하게 하는 이론적 단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거사 직전인 6월 7일 계획이 사전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0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