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금천(金川) 사람이다. 고향에서 한학을 익힌 뒤, 사립 한영서원(韓英書院)·개성사립학교(開城私立學校)·금천시 변리소학교(邊里小學校)를 거쳐 해주도립잠업전수학교(海州道立蠶業專修學校)를 졸업하고 금천군 잠업지도원으로 취직하여 동군 호현면(好賢面)을 담당하던 중, 1920년 5월 정희도(丁熙道)로부터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퇴직한 그는 일본 관공서에서 일하는 한국인 관리에게 퇴직을 종용하는 항일독립문서를 작성·배포하는 등 민족정신 고취활동을 전개하다가 정희도가 일경에 붙잡히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22년 만주를 거쳐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 도착 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한 무료진료소에 근무하였으며, 이듬해인 1923년에는 소주(蘇州) 소재의 중국기술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상해로 돌아온 그는 1933∼34년 흥사단(興士團) 원동반(遠東班)에 입단하여 제3반 반장직을 맡아 활동하였고, 인성학교(仁成學校)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동포 자녀들의 민족교육에 헌신하였다. 1934년 봄 김구가 한국화 중국간에 국제적 연대를 형성하여 독자적인 투쟁역량을 강화해 나가기 위해 중국 국민당정부 장개석(蔣介石)의 후원하에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낙양분교 내에 한인특별반을 조직하고, 낙양군관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12월 하순에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결성하였다. 이에 따라 1934년 2월 김구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입단한 그는 낙양군관학교 입교생 모집원으로 파견되어 1935년 1월 이재천(李在天) 등을 모집하여 입교시키는 한편, 동월 22일 상해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고문으로 친일 밀정노릇을 해온 이용로(李容魯)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에 연루되어 3월 26일 상해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의해 붙잡혔다. 1936년 4월 2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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