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당시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황해도 곡산(谷山) 출신이다. 천도교(天道敎) 신자로서 봉훈(奉訓)의 책임을 맡아 교세확장에 노력하던 중, 1919년 2월 7일 이종일(李鍾一)로부터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28일에는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자기의 결심을 밝히고 허락을 받았다. 이에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 약 1천 매를 받아가지고 황해도 서흥(瑞興)의 천도교구로 가서, 교도 박동주(朴東周)에게 570부를 배부하여 해주(海州)와 사리원(沙里院)지역에 배포하게 하고, 나머지는 수안(遂安) 지역에 배포케 하는 책임을 맡았다. 또한 서울에서는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니, 지방에서도 이에 따라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도록 연락하는 책임을 맡았다. 서울을 출발하여 자기가 담당한 서흥·해주·사리원·수안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독립운동계획을 전달한 뒤에, 그는 고향인 곡산으로 돌아와 그곳의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다가, 3월 4일 수안 송항리(松項里)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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