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0월 24일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 신설리(新設里)에 거주하는 청년들과 함께 숭인친목회관(崇仁親睦會館) 내에서 토요회(土曜會)를 설립하고 집행위원을 맡았다. 이 당시 그는 서울 배제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에 재학 중이었다.
1926년 3월 배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8월 14일 동대문(東大門) 밖의 보창학원(普昌學院) 내에서 흥인청년회(興仁靑年會)를 창립하고 간사를 맡았다. 흥인청년회에서는 “청년운동의 호상(互相) 연결을 도모할 것과 일반 청년의 문맹(文盲)을 퇴치하는 동시에 과학적 사회지식을 보급시킬 것”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중국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입학할 목적으로 1927년 4월 10일경 광둥성(廣東省) 광저우시(廣州市)에 갔다. 학교에 입학하려면 유월한국혁명동지회(留粤韓國革命同志會)의 추천이 필요했다. 6월 중순경 김진동(金鎭東)의 소개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가입했다. 이 사이에 서응호(徐應浩)·김철호(金哲鎬) 등과 교류하면서 의열단(義烈團)에도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9월 중산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안중근(安重根)의 조카인 안우생(安偶生) 등과 교류했다. 12월 일명 ‘광저우 봉기’가 일어나 학교가 폐쇄되자, 1928년 2월 1일 서울로 돌아왔다.
1928년 6월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京城支會) 간부 박완(朴浣)의 소개로 신간회에 가입하여 본부지회의 위원이 되었다. 1929년 5월 상순경 이항발(李恒發) 등 이른바 ‘서울계’ 사회주의자들이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를 조직하자, 경기도 책임인 심원섭(沈遠燮)의 권유로 여기에 몸담았다. 6월 16일 설립된 신간회 경동지회(京東支會)의 간부가 되어, 조직부 총무간사, 대표회원 등으로 활동했다. 6월 서울청년회의 위원이 되어 상무부원이 되었다. 8월 초순경 이정환(李正丸)의 소개로 중앙청년동맹(中央靑年同盟)에 가입했다. 27일 중앙청년동맹 동구지부(東區地部, 일명 京東靑年同盟)를 설립하고 집행위원장 및 대의원으로 뽑혔다.
1929년 10월 김지수(金之洙) 등과 함께 본정경찰서(本町警察署) 고등계(高等係)에 체포되었다. 과거 중국에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와 의열단에 가입한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당시 단원이었던 서응호 등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의열단(義烈團) 사건’으로 확대된 것이었다. 취조를 받던 15일에 부인이 사망하여, 부친의 보증 아래 임시로 석방되어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12월 6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다음날 석방되었다.
출옥 후 곧바로 광주학생운동 관련 격문 사건으로 촉발된 ‘학생전위동맹(學生前衛同盟)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30년 1월 29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9월 13일 예심 면소(免訴) 처분을 받고 출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