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남 함흥(咸興) 사람이다. 1904년 7월 노령 해삼위(海蔘威)로 망명하여 1907년 노령 신한촌(新韓村)에서 최봉준(崔鳳俊)·우덕순(禹德淳)·김치보(金致甫) 등과 함께 일제의 침략에 대한 격퇴 계획을 수립하고 활동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이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주살하기 위하여 하얼빈(哈爾濱)으로 갈 때 그에게 200원을 여비로 지원하였다. 그는 1910년 10월 노령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인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박은식(朴殷植) 등과 친교를 맺고 독립운동의 방안을 숙의하면서 안중근이 침략원흉 이등박문을 주살한 후 일경에게 붙잡히자 사재(私財)를 털어 러시아 및 영국인 변호사를 선임하여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안중근 의사의 가족과 1911년 3월 통감부의 친일파 고문이었던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한 전명운(田明雲) 의사 가족들의 생계지원을 맡아 하였다. 1920년 6월 1일 상해(上海)의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자이던 이영렬(李英烈)로부터 <임시정부공보(臨時政府公報)>와 문헌 등 선전물 400여 부를 송부받아 국내에 배포하고자 하였으나 일제 헌병대에 압수당하였다. 또 동년 9월 미국 워싱턴 소재 친한단체(親韓團體)인 '조선의 우회(友會)' 본부로부터 입회서 용지와 영문 인쇄물이 송부되자 이를 국내에 배포하였다. 1923년 10월 중국 동삼성(東三省)에서 일경에 붙잡혀 온갖 악형을 당하고 약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여 고향 함흥의 누이동생 집으로 이주한 뒤 각지를 전전하면서 교육구국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며 활동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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