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 사람이다. 1904년 망명 후, 1907년 최봉준 등과 함께 일제의 침략에 대한 격퇴 계획을 수립하였다. 1909년 안중근에게 여비를 지원하였고, 그의 석방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였다. 1920년 국내에 독립운동 관련 선전물을 배포하고자 하였으나 압수당하였고, 1923년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후 고향으로 돌아가 교육구국운동에 힘썼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이명
-
성별
남성
본적지
함경남도 함흥
생몰 연월일
1882-03-18 ~ 1953-10-10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
애국장 (1990)
활동정보
함남 함흥(咸興) 사람이다.
1904년 7월 노령 해삼위(海蔘威)로 망명하여 1907년 노령 신한촌(新韓村)에서 최봉준(崔鳳俊)·우덕순(禹德淳)·김치보(金致甫) 등과 함께 일제의 침략에 대한 격퇴 계획을 수립하고 활동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이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주살하기 위하여 하얼빈(哈爾濱)으로 갈 때 그에게 200원을 여비로 지원하였다.
그는 1910년 10월 노령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인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박은식(朴殷植) 등과 친교를 맺고 독립운동의 방안을 숙의하면서 안중근이 침략원흉 이등박문을 주살한 후 일경에게 붙잡히자 사재(私財)를 털어 러시아 및 영국인 변호사를 선임하여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안중근 의사의 가족과 1911년 3월 통감부의 친일파 고문이었던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한 전명운(田明雲) 의사 가족들의 생계지원을 맡아 하였다.
1920년 6월 1일 상해(上海)의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자이던 이영렬(李英烈)로부터 <임시정부공보(臨時政府公報)>와 문헌 등 선전물 400여 부를 송부받아 국내에 배포하고자 하였으나 일제 헌병대에 압수당하였다. 또 동년 9월 미국 워싱턴 소재 친한단체(親韓團體)인 '조선의 우회(友會)' 본부로부터 입회서 용지와 영문 인쇄물이 송부되자 이를 국내에 배포하였다.
1923년 10월 중국 동삼성(東三省)에서 일경에 붙잡혀 온갖 악형을 당하고 약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여 고향 함흥의 누이동생 집으로 이주한 뒤 각지를 전전하면서 교육구국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며 활동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