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산구(山口)상업고등학교 재학중인 1939년 2월에 동교생 민병구(閔炳久)·황계주(黃啓周)·성창환(成昌煥) 등과 함께 교내의 조선인학생 친목단체였던 여우회(麗友會)의 성격을 항일결사로 바꾸고, 동회를 중심으로 일제의 식민정책인 내선일체·조선어폐지·창씨개명·지원병제도 등을 반대하고 민족의식을 길러갔다.
동년 말경에 부산에서 열렸던 동회의 졸업생 송별회석상에서 그는 동지 15명과 함께 모여 동지간 결속을 강화하고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또한 다음해 4월에는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신입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내선일체 등을 단호히 배격하는 등 항일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는 평소부터 일본의 천황제(天皇制)를 비판하던 중, 일본 황족이 동교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이를 위해 도열한 학생들의 앞을 그대로 지나가는 등 일본인의 천황숭배를 경멸하였다.
이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1941년 9월에 산구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불경죄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후 6·25전쟁때는 국군 소위로 참전하였다가 1951년 11월 18일에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