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영광(靈光)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날 당시 서울에서 유학하던 중,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같은 유학생인 조철현(曺喆鉉)과 함께 3월 5일 귀향하였다. 귀향후 읍내의 노동조합장인 정인영(鄭仁英)과 보통학교 선생인 이병영(李秉英)·박태엽(朴泰燁) 등을 만나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상황을 알려주고 영광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제의하여 찬성을 얻었다. 3월 10일 정오에 영광읍 장터에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그는 정인영·조철현과 함께 주민의 연락·동원을 담당하였으며, 이병영과 박태엽은 학교생도의 참가를 분담하였다. 한편,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을 참례하러 서울에 올라간 읍내 유지 이좌근(李左根)이 귀향하여 조병현(曺炳鉉)·조맹환(曺孟煥)·노 준(魯駿)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박병문(朴炳文)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며 9일 밤 그 일부를 배포하였다. 이튿날인 10일 정오경 영광읍 장터에 수백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시위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철현의 국내외 정세에 대한 연설이 있은 다음, 정인영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의 선두에 서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제의 무력행사로 말미암아 강제로 해산되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때 몸을 피하여 노 준·조철현과 함께 상경하여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이해 8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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