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남상목
11월의 독립운동가 남상목(南相參)선생
선생은 1876년 4월 12일(고종 13년)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 (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에서 의령남씨 진희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교 가풍 속에서 한학을 공부하여 경학은 물론 주역과 병서류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생이 29세 되던 해인 1904년, 일제는 러시아와의 전쟁 수행을 위해 한일의정서를 체결, 강제로 조선인의 인력과 물자를 앗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그해 5월경에는 선생의 고향인 낙생면 하운산리의 수목을 무기 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낙생면과 언주면, 를 마면 등 3개 연민을 동원하여 노임도 주지 않은 채 수목을 베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선생은 일본인 감독관 나가이(中井)를 폭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거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온갖 폭행을 당하고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몸 바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을사조약 늑결, 고종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등 정국은 더욱 나빠졌고, 일제의 침략 야욕은 한반도 전체를 뒤흔들었다. 정미 조약의 부수각서에 의해 8월 1일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어, 나라의 미래가 위태롭다고 느낀 선생은 고향인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항거하였고 선생의 휘하에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의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선생은 1908년 8월경에 김재선 등을 자신의 의병부대에 편입시켜 좌익장에 임명하였으며, 후군장, 종사, 포군 등을 임명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충북 음성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전개하였다.
선생의 휘하에서 활동한 의병들의 관련 기록으로 보아 남상목부대의 활동범위는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충북 지역까지 필쳐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생은 1908년 11월, 판교의 가족을 만나러 가던 중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느릿골' 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장파열로 1908년 11월 4일에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청계산 아래 '후천골' 에 가때장 되었으며 해방 후 고향인 성남시 하산운동의 '뒷내골' 선산에 안장되었 다가 대전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12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11월의 독립운동가 남상목선열 기획사진전 기 간 : 2008. 11. 1~ 11. 30 장 소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독립기념관
* 11월의 독립운동가 남상목선열 공훈선양 학술강연회 일 시 : 2008. 11. (화) 1100~ 장 소 : 경기도 성남시 문화원 주 관 - 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회(-02-365-4387-8)
*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인터넷 서비스 명 칭 : 이달의 독립운동가 http://www.mpva.go.kr
의령남씨 진희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교 가풍속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선생은 1876년 4월 12일(고종 13년)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하산운리 (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에서 의령남씨 진희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교 가풍 속에서 한학을 공부하여 경학은 물론 주역과 병서류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생이 29세 되던 해인 1904년, 일제는 러시아와의 전쟁 수행을 위해 한일의정서를 체결, 강제로 조선인의 인력과 물자를 앗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그해 5월경에는 선생의 고향인 낙생면 하운산리의 수목을 무기 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낙생면과 언주면, 를 마면 등 3개 연민을 동원하여 노임도 주지 않은 채 수목을 베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선생은 일본인 감독관 나가이(中井)를 폭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거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온갖 폭행을 당하고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몸 바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을사조약 늑결, 고종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등 정국은 더욱 나빠졌고, 일제의 침략 야욕은 한반도 전체를 뒤흔들었다. 정미 조약의 부수각서에 의해 8월 1일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어, 나라의 미래가 위태롭다고 느낀 선생은 고향인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항거하였고 선생의 휘하에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의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선생은 1908년 8월경에 김재선 등을 자신의 의병부대에 편입시켜 좌익장에 임명하였으며, 후군장, 종사, 포군 등을 임명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충북 음성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전개하였다.
선생의 휘하에서 활동한 의병들의 관련 기록으로 보아 남상목부대의 활동범위는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충북 지역까지 필쳐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생은 1908년 11월, 판교의 가족을 만나러 가던 중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느릿골' 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장파열로 1908년 11월 4일에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청계산 아래 '후천골' 에 가때장 되었으며 해방 후 고향인 성남시 하산운동의 '뒷내골' 선산에 안장되었 다가 대전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12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11월의 독립운동가 남상목선열 기획사진전 기 간 : 2008. 11. 1~ 11. 30 장 소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독립기념관
* 11월의 독립운동가 남상목선열 공훈선양 학술강연회 일 시 : 2008. 11. (화) 1100~ 장 소 : 경기도 성남시 문화원 주 관 - 대한민국 순국선열유족회(-02-365-4387-8)
*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인터넷 서비스 명 칭 : 이달의 독립운동가 http://www.mpva.go.kr
의령남씨 진희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교 가풍속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