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권동진
우당 권동진 선생
(1861.12.15~1947.3.9)
선생은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일찍이 조국 근대화와 부국강병에 9세 때 사관망성소에 입학이였다. 어기서 2년의 군사교육 과정을 마치고 근무하였고, 이후에는 임안군수와 거문도 첨사를 역임하였다.
에서 생활이였고 1906년 귀국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조국 근대화를 위했다. 교주 손병의의 영항으로 천도교에 입도이여 도시로 활동이면서 펼쳤다. 나아가 한말 계몽운동 단체로 대한사강회를 계승한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당시에는 소위 출세를 하려면 권문세가를 찾는 것이 세태였지만, 그에게는 그와 같은 처세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오로지 의기 충천한 동료 군인들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새로운 개혁의 방향을 모색해 나갔다. 한편15여년을 군인으로 몸담아 오던 그에게 1895년의 을미사변은 생의 전환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집안의 상을 당해 서울에 머물던 그는 새로이 조직을 재편한 훈련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훈련대에는 그의 형 권형진이 제2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권형진이 1895년 8월 대원군의 ‘명성황후폐위’ 획책에 가담하면서 선생을 포함한 동지 8명도 경복궁 점령에 가담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 낭인들의 명성황후 시해 음모와는 관계없이, 명성황후를 폐위시키려는 대원군의 획책에 동원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로 결국 그는 1895년 12월 일본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이 무렵 그는 오사카로 건너갔다가, 손병희를 만나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손병희와의 만남은 그의 행로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타고난 무인 체질인 그였지만, 손병희와의 만남을 통해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감복하고, 급기야 천도교에 입교한 것이다. 이후 귀국하기까지 그는 손병희, 오세창 등과 굳게 결합하여 민족의 장래와 천도교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 갔다. 1906년 1월 5일 손병희 등과 함께 국내로 돌아온 그는 우선 천도교의 조직 정비에 힘을 쏟아 나갔다. 천도교대헌의 규정에 따라 대도주(大道主)에 취임한 손병희는 모든 교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천도교대헌은 권동진과 오세창, 양한묵 등이 힘을 모아 작성한 것이었다. 그는 손병희를 보좌하며, 도집(都執), 도사(道師)를 맡는 한편 전제관장, 포덕 주임 등을 역임하며 천도교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귀국 직후 그는 중추원 부참의(副參議)에 임명되었으나 2개월여 만에 그만두고, 출판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는 등 계몽운동에 정진해 갔다. 그가 전개한 계몽운동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대한협회 활동이었다.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1907년 11월 설립된 대한협회는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을 주지로 국민계몽을 전개한 계몽운동단체였다. 그는 대한협회 실업부장과 부회장 등을 맡으며, 실업 진작을 통한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해방을 맞이할 때, 그의 나이 85세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는 건국운동에 매진해 갔다. 그는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국가 건설에 힘을 기울이는가 하면, 1945년 12월 신탁통치의 소식이 전해지자 신탁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독립국가 수립에 온 힘을 쏟아 나갔다. 또한 정치권이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대립하는 분열상태를 보이자, 신한민족당을 결성하며 ‘자율적 통일정권 수립을 목표로 전민족의 총의와 총력을 집중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건국운동은 독립운동을 계승한 민족운동이었으며,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려는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독립 달성을 위해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그는 해방정국의 혼란이 가중되던 1947년 3월 9일 87세의 나이로 서거하고 말았다. 그의 장례는 천도교당에서 사회단체장으로 치러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3·1운동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에 참여하고 신간회 부회장으로 광주학생운동 지원한 권동진
(1861.12.15~1947.3.9)
선생은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일찍이 조국 근대화와 부국강병에 9세 때 사관망성소에 입학이였다. 어기서 2년의 군사교육 과정을 마치고 근무하였고, 이후에는 임안군수와 거문도 첨사를 역임하였다.
에서 생활이였고 1906년 귀국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조국 근대화를 위했다. 교주 손병의의 영항으로 천도교에 입도이여 도시로 활동이면서 펼쳤다. 나아가 한말 계몽운동 단체로 대한사강회를 계승한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당시에는 소위 출세를 하려면 권문세가를 찾는 것이 세태였지만, 그에게는 그와 같은 처세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오로지 의기 충천한 동료 군인들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새로운 개혁의 방향을 모색해 나갔다. 한편15여년을 군인으로 몸담아 오던 그에게 1895년의 을미사변은 생의 전환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집안의 상을 당해 서울에 머물던 그는 새로이 조직을 재편한 훈련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훈련대에는 그의 형 권형진이 제2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권형진이 1895년 8월 대원군의 ‘명성황후폐위’ 획책에 가담하면서 선생을 포함한 동지 8명도 경복궁 점령에 가담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 낭인들의 명성황후 시해 음모와는 관계없이, 명성황후를 폐위시키려는 대원군의 획책에 동원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로 결국 그는 1895년 12월 일본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이 무렵 그는 오사카로 건너갔다가, 손병희를 만나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손병희와의 만남은 그의 행로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타고난 무인 체질인 그였지만, 손병희와의 만남을 통해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감복하고, 급기야 천도교에 입교한 것이다. 이후 귀국하기까지 그는 손병희, 오세창 등과 굳게 결합하여 민족의 장래와 천도교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 갔다. 1906년 1월 5일 손병희 등과 함께 국내로 돌아온 그는 우선 천도교의 조직 정비에 힘을 쏟아 나갔다. 천도교대헌의 규정에 따라 대도주(大道主)에 취임한 손병희는 모든 교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천도교대헌은 권동진과 오세창, 양한묵 등이 힘을 모아 작성한 것이었다. 그는 손병희를 보좌하며, 도집(都執), 도사(道師)를 맡는 한편 전제관장, 포덕 주임 등을 역임하며 천도교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귀국 직후 그는 중추원 부참의(副參議)에 임명되었으나 2개월여 만에 그만두고, 출판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는 등 계몽운동에 정진해 갔다. 그가 전개한 계몽운동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대한협회 활동이었다.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1907년 11월 설립된 대한협회는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을 주지로 국민계몽을 전개한 계몽운동단체였다. 그는 대한협회 실업부장과 부회장 등을 맡으며, 실업 진작을 통한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해방을 맞이할 때, 그의 나이 85세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는 건국운동에 매진해 갔다. 그는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국가 건설에 힘을 기울이는가 하면, 1945년 12월 신탁통치의 소식이 전해지자 신탁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독립국가 수립에 온 힘을 쏟아 나갔다. 또한 정치권이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대립하는 분열상태를 보이자, 신한민족당을 결성하며 ‘자율적 통일정권 수립을 목표로 전민족의 총의와 총력을 집중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건국운동은 독립운동을 계승한 민족운동이었으며,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려는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독립 달성을 위해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그는 해방정국의 혼란이 가중되던 1947년 3월 9일 87세의 나이로 서거하고 말았다. 그의 장례는 천도교당에서 사회단체장으로 치러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3·1운동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에 참여하고 신간회 부회장으로 광주학생운동 지원한 권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