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정환직
정환직 선생은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 자양면 검단리에서 아버지 정유원과 어머니 순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887년에 44세의 늦은 나이로 벼슬길에 올라 1888년(고종 25)의금부의 금부도사를 지냈으며, 1894년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에 임명되어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해 겨울 다시 토포사(討捕使)에 임명되어 고종의 밀지를 받고 황해도지방의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태의원시종관(太醫院侍從官)이 되었다.
1899년 삼남검찰 겸 토포사(三南檢察兼討捕使)로 삼남일대의 민정을 두루 살펴보았고, 1900년 도찰사에 임명되어 농민들의 원성이 높은 경주부윤을 파면하다가 오히려 봉세관(俸稅官)에 의하여 구금되었으며, 석방된 뒤 관직에 뜻이 없어 사직을 고수하였으나 다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다.
1905년 일제의 강권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고종은 그에게 밀지를 보내며 구국거의(救國擧義)의 뜻을 전하였다.
그뒤 관직을 사직하고 큰아들 정용기(鄭鏞基 : 1862~1907)와 함께 1906년 3월 영천에서 1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켰다. 영남 전 지역을 망라하며 활발한 의병운동을 전개한 산남의진은 규모나 활동면에서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의진 중 하나였다.
신돌석 의병진을 돕고자 진군하던 아들 정용기 대장이 1906년 일본군에 피체되었으나 선생의 노력으로 9월에 영천으로 돌아와 의진을 정비할 수 있었다. 정용기 대장은 일본군이 영일군 죽장면 입암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9월 1일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역습을 받아 정용기 대장을 비롯하여 의진의 핵심부장과 의병 대다수가 전사하였다.
아들 정용기가 입암에서 영천수비대소속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적군의 총탄에 의하여 순절하자, 정순기(鄭純基)·이세기(李世紀)·우재룡(禹在龍) 등의 추대를 받아 삼남의병부대의 의병장에 올랐다. 그뒤 군세가 크게 떨치기 시작하자 그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 포항 등지, 서쪽으로 신령 등지, 북쪽으로 청송 등지를 공격하여 일본군수비대에게 많은 피해를 가하였다. 그러나 전투중 사상된 의병이 속출하게 되자 전의가 크게 떨어져, 이에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각지에 소모군을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와 탄약·군량 등을 준비하는 한편, 국민들의 반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이때 병이 들어 신병을 치료하다가 1907년 11월 청하면 각전(角田)에서 일본군수비대에게 잡혔다. 일본군이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반일의 뜻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영천의 남쪽 교외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으며 2007년 8월 1일 국가보훈처는 정환직 선생 100주년을 맞아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삼남 관찰사와 도찰사를 지내고 아들 정용진 의병장 전사후 산남의진 의병장으로 활동
1899년 삼남검찰 겸 토포사(三南檢察兼討捕使)로 삼남일대의 민정을 두루 살펴보았고, 1900년 도찰사에 임명되어 농민들의 원성이 높은 경주부윤을 파면하다가 오히려 봉세관(俸稅官)에 의하여 구금되었으며, 석방된 뒤 관직에 뜻이 없어 사직을 고수하였으나 다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다.
1905년 일제의 강권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고종은 그에게 밀지를 보내며 구국거의(救國擧義)의 뜻을 전하였다.
그뒤 관직을 사직하고 큰아들 정용기(鄭鏞基 : 1862~1907)와 함께 1906년 3월 영천에서 1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켰다. 영남 전 지역을 망라하며 활발한 의병운동을 전개한 산남의진은 규모나 활동면에서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의진 중 하나였다.
신돌석 의병진을 돕고자 진군하던 아들 정용기 대장이 1906년 일본군에 피체되었으나 선생의 노력으로 9월에 영천으로 돌아와 의진을 정비할 수 있었다. 정용기 대장은 일본군이 영일군 죽장면 입암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9월 1일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역습을 받아 정용기 대장을 비롯하여 의진의 핵심부장과 의병 대다수가 전사하였다.
아들 정용기가 입암에서 영천수비대소속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적군의 총탄에 의하여 순절하자, 정순기(鄭純基)·이세기(李世紀)·우재룡(禹在龍) 등의 추대를 받아 삼남의병부대의 의병장에 올랐다. 그뒤 군세가 크게 떨치기 시작하자 그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 포항 등지, 서쪽으로 신령 등지, 북쪽으로 청송 등지를 공격하여 일본군수비대에게 많은 피해를 가하였다. 그러나 전투중 사상된 의병이 속출하게 되자 전의가 크게 떨어져, 이에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각지에 소모군을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와 탄약·군량 등을 준비하는 한편, 국민들의 반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이때 병이 들어 신병을 치료하다가 1907년 11월 청하면 각전(角田)에서 일본군수비대에게 잡혔다. 일본군이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반일의 뜻을 굽히지 않다가 결국 영천의 남쪽 교외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으며 2007년 8월 1일 국가보훈처는 정환직 선생 100주년을 맞아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삼남 관찰사와 도찰사를 지내고 아들 정용진 의병장 전사후 산남의진 의병장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