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박시창
선생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가던 1903년 11월 경기도 시흥(始興)에서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선생의 부친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의 임시대통령을 역임하였으며 한국통사 등 역사연구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선각자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 박은식의 강렬한 민족정신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오성학교 졸업후 선생은 부친 백암 박은식의 지인을 따라 해삼위(海蔘威)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선생은 부친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그때부터 선생은 부친 박은식이 1925년 11월 타계할 때까지 그를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선생은 노령(露領)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하였으며 같은해 9월말 부친 박은식과 함께 하얼빈을 거쳐 상해(上海)로 갔다. 당시 상해에는 3.1운동 직후 출현한 국내외의 임시정부를 하나로 합친 이른바 통합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민족지사들이 운집하고 있었다.
1935년경 선생은 김구(金九)의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모집활동에도 협력하였다. 1934년에는 김구는 만주에서 남하한 이청천(李靑天) 등과 합작하여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한인특별반을 설립하여 한인 군사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김구는 각지에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모집원을 파견하였으며, 주요 지역에는 지방 연락원을 배치하였다. 이에 1935년 9월 무렵 김구는 북경, 광동(廣東), 낙양(洛陽), 상해 등지에 중견인물들을 파견하여 연락업무를 맡겼다. 김구와 지방 연락원의 통신에는 남경(南京)우체국 사서함이 이용되었다. 이 가운데 선생은 노태연(盧泰然), 염온동(廉溫東)과 더불어 낙양에 배치되어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에는 윤봉길의거(尹奉吉義擧) 이후 오랫동안 피난살이를 했던 임시정부가 최종적으로 중경(重慶)에 안착하였다. 임시정부는 산하에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였다. 임시정부의 국군에 해당하는 한국광복군은 창설 직후 총사령부를 최전선인 서안(西安)으로 이동하는 등 대일전열을 재정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2년 5월에는 화북(華北)의 팔로군지역(八路軍地域)으로 북상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주력을 제외한 중경에 잔류하고 있던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던 1938년 10월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직되어 1942년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까지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주로 일본군 포로 심문, 대일본군 반전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선생은 이때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1945년 10월 7일 광복군 상해잠편지대장이었던 선생은 광복군 총사령부 주호 판사처장(辦事處長) 김학규(金學奎)와 함께 상해에 도착한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장군에 대해 특파단 활동 상황과 한적 사병 인수 집결에 관한 업무를 보고하였다. 그런 다음 선생은 10월 10일경 상해 호강대학에 집결 중인 한적 사병 6천여 명의 사열식(査閱式)을 대학 광장에서 진행하였다. 비록 일본 군복을 입은 그대로의 대열이었으나, 새로 광복군으로 편입된 이들의 씩씩한 모습과 늠름한 행진은 보는 사람으로 깊은 감명을 자아내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상해사변 시 대일전에 참여하고,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와 상해지대장으로 활약
오성학교 졸업후 선생은 부친 백암 박은식의 지인을 따라 해삼위(海蔘威)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선생은 부친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그때부터 선생은 부친 박은식이 1925년 11월 타계할 때까지 그를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선생은 노령(露領)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하였으며 같은해 9월말 부친 박은식과 함께 하얼빈을 거쳐 상해(上海)로 갔다. 당시 상해에는 3.1운동 직후 출현한 국내외의 임시정부를 하나로 합친 이른바 통합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민족지사들이 운집하고 있었다.
1935년경 선생은 김구(金九)의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모집활동에도 협력하였다. 1934년에는 김구는 만주에서 남하한 이청천(李靑天) 등과 합작하여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한인특별반을 설립하여 한인 군사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김구는 각지에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모집원을 파견하였으며, 주요 지역에는 지방 연락원을 배치하였다. 이에 1935년 9월 무렵 김구는 북경, 광동(廣東), 낙양(洛陽), 상해 등지에 중견인물들을 파견하여 연락업무를 맡겼다. 김구와 지방 연락원의 통신에는 남경(南京)우체국 사서함이 이용되었다. 이 가운데 선생은 노태연(盧泰然), 염온동(廉溫東)과 더불어 낙양에 배치되어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에는 윤봉길의거(尹奉吉義擧) 이후 오랫동안 피난살이를 했던 임시정부가 최종적으로 중경(重慶)에 안착하였다. 임시정부는 산하에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였다. 임시정부의 국군에 해당하는 한국광복군은 창설 직후 총사령부를 최전선인 서안(西安)으로 이동하는 등 대일전열을 재정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2년 5월에는 화북(華北)의 팔로군지역(八路軍地域)으로 북상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주력을 제외한 중경에 잔류하고 있던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던 1938년 10월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직되어 1942년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까지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주로 일본군 포로 심문, 대일본군 반전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선생은 이때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1945년 10월 7일 광복군 상해잠편지대장이었던 선생은 광복군 총사령부 주호 판사처장(辦事處長) 김학규(金學奎)와 함께 상해에 도착한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장군에 대해 특파단 활동 상황과 한적 사병 인수 집결에 관한 업무를 보고하였다. 그런 다음 선생은 10월 10일경 상해 호강대학에 집결 중인 한적 사병 6천여 명의 사열식(査閱式)을 대학 광장에서 진행하였다. 비록 일본 군복을 입은 그대로의 대열이었으나, 새로 광복군으로 편입된 이들의 씩씩한 모습과 늠름한 행진은 보는 사람으로 깊은 감명을 자아내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상해사변 시 대일전에 참여하고,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와 상해지대장으로 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