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최산두, 손영각, 이한구
전국 의병 연합을 꿈꾼 산남의진의 의병 <이한구·손영각·최산두 선생>
산남의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을 되찾기 위해 경북 영천을 중심으로 결성된 의병부대이다. 유생을 비롯하여 농민, 포수, 군인 등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참여했으며, 체계적인 군사 조직을 갖추고 경상도 동북부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산남의진은 강원도 강릉으로 북상하여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한 뒤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한구(1870년~1907년) 선생은 산남의진 결성 당시 핵심병력을 지휘하는 중군장에 선임되었다. 대장 정용기(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가 체포되자 의진을 이끌었다. 1907년 산남의진이 재결성되자 다시 중군장으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입암전투에서 전사했다.
손영각(1855년~1907년) 선생은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참모장을 맡아 의병대장을 보좌하여 의진의 작전과 운영을 담당하였다. 그러다 입암전투에서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와 함께 전사했다.
산남의진은 초기에는 병력을 결집해 일본군과 정면으로 맞섰지만, 일본군의 탄압이 강화되자 1908년부터는 부대를 여러 지역에 분산하고 산악지대를 활용한 유격전을 전개하며 항쟁을 이어갔다.
최산두(1888년~1926년) 선생은 지도부가 잇달아 순국한 뒤 분산된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군자금과 무기·식량 등을 모집했다. 군수물자 모집활동을 이어가던 중 체포되어 종신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1910년 강제병합 직후 시행된 대사령으로 풀려났다.
산남의진은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여러 차례 조직을 정비하여 의병전쟁을 이어갔다. 지도부가 잇달아 전사하는 심대한 타격 속에서도, 그때마다 새로운 지도부를 세워 항쟁을 지속했다.
또한, 지역적 한계를 넘어 다른 의병부대와의 연대를 적극 추진하였으며, 강원도 강릉 방면으로 북상하여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한 뒤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전국 의병부대가 연합한 '13도창의군 서울진공작전'과 맥을 같이하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산남의진의 의병전쟁은 국권 회복 운동이 특정한 인물이나 한 세대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앞선 이가 쓰러지면 다음 이가 그 뜻을 이어받았고, 각 지역과 다양한 신분이 연대하면서 항쟁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정부는 애국지사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한구, 손영각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최산두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산남의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을 되찾기 위해 경북 영천을 중심으로 결성된 의병부대이다. 유생을 비롯하여 농민, 포수, 군인 등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참여했으며, 체계적인 군사 조직을 갖추고 경상도 동북부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산남의진은 강원도 강릉으로 북상하여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한 뒤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한구(1870년~1907년) 선생은 산남의진 결성 당시 핵심병력을 지휘하는 중군장에 선임되었다. 대장 정용기(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가 체포되자 의진을 이끌었다. 1907년 산남의진이 재결성되자 다시 중군장으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입암전투에서 전사했다.
손영각(1855년~1907년) 선생은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참모장을 맡아 의병대장을 보좌하여 의진의 작전과 운영을 담당하였다. 그러다 입암전투에서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와 함께 전사했다.
산남의진은 초기에는 병력을 결집해 일본군과 정면으로 맞섰지만, 일본군의 탄압이 강화되자 1908년부터는 부대를 여러 지역에 분산하고 산악지대를 활용한 유격전을 전개하며 항쟁을 이어갔다.
최산두(1888년~1926년) 선생은 지도부가 잇달아 순국한 뒤 분산된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군자금과 무기·식량 등을 모집했다. 군수물자 모집활동을 이어가던 중 체포되어 종신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1910년 강제병합 직후 시행된 대사령으로 풀려났다.
산남의진은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여러 차례 조직을 정비하여 의병전쟁을 이어갔다. 지도부가 잇달아 전사하는 심대한 타격 속에서도, 그때마다 새로운 지도부를 세워 항쟁을 지속했다.
또한, 지역적 한계를 넘어 다른 의병부대와의 연대를 적극 추진하였으며, 강원도 강릉 방면으로 북상하여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한 뒤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전국 의병부대가 연합한 '13도창의군 서울진공작전'과 맥을 같이하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산남의진의 의병전쟁은 국권 회복 운동이 특정한 인물이나 한 세대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앞선 이가 쓰러지면 다음 이가 그 뜻을 이어받았고, 각 지역과 다양한 신분이 연대하면서 항쟁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정부는 애국지사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한구, 손영각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최산두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