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우재룡
우재룡 선생은 1884년 1월 3일 경상남도 창녕군(學書)에서 6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군대에 1902년 들어가 대구 진위대에 입대하여 5년간 근무하던 중 산남의진 의병장인 정용기(鄭鍾基)가 대구 감옥에 수감되면서 그를 만나게 되어 큰 감화를 받았다.
선생은 대구 진위대에 근무하던 중 군대해산을 당했다. 군대해산에 반대해 동지들과 진영을 탈영하여, 석방된 정용기가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청송의 '산남의진을 찾아가 의병전쟁에 참여하게 된 때의 선생의 나이 24세였다.
선생은 연습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병사들을 흔련시켜 의진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고 1908년 2월부터 7월까지 청송, 영일 등 경북 일원에서 일본군과 20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하였으나 1908년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로 종신유형 처분을 받았으나 합방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1915년 대구에서 광복회 결성에 참여하여 비밀 · 폭동 · 암살 명령의 4대 행동강령을 두고 독립전쟁 실현을 위해 전국에 군대식으로 만든 광복회 지부와 연락기관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령부로서 길림광복회를 설치하 고, 군자금 모집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친일파 처단을 통해 친일세력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1919년 9월 선생은 군자금 7천여원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임시정부와 힘을 합쳐 1920년 1월 광복단결사대(조선독립군사령부) 조직에 착수, 1920 년 6월 '주비단'을 조직하여 활동 중 임시정부의 '임시군사주비단' 사건으로 1922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937년까지 무려 16년간의 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신국가건설에 동참해 민중의 발전과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일제강점기 뜻을 같이 했던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광복회'를 재건하고, 대한문관학교설립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다. 1955년 3월 3일(음) 대구에서 서거하셨으며, 1967년 현재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하였다.
대구진위대에 입대하여 근무하던 중 정용기를 만나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하였다.
대한제국 군대에 1902년 들어가 대구 진위대에 입대하여 5년간 근무하던 중 산남의진 의병장인 정용기(鄭鍾基)가 대구 감옥에 수감되면서 그를 만나게 되어 큰 감화를 받았다.
선생은 대구 진위대에 근무하던 중 군대해산을 당했다. 군대해산에 반대해 동지들과 진영을 탈영하여, 석방된 정용기가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청송의 '산남의진을 찾아가 의병전쟁에 참여하게 된 때의 선생의 나이 24세였다.
선생은 연습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병사들을 흔련시켜 의진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고 1908년 2월부터 7월까지 청송, 영일 등 경북 일원에서 일본군과 20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하였으나 1908년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로 종신유형 처분을 받았으나 합방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1915년 대구에서 광복회 결성에 참여하여 비밀 · 폭동 · 암살 명령의 4대 행동강령을 두고 독립전쟁 실현을 위해 전국에 군대식으로 만든 광복회 지부와 연락기관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령부로서 길림광복회를 설치하 고, 군자금 모집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친일파 처단을 통해 친일세력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1919년 9월 선생은 군자금 7천여원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임시정부와 힘을 합쳐 1920년 1월 광복단결사대(조선독립군사령부) 조직에 착수, 1920 년 6월 '주비단'을 조직하여 활동 중 임시정부의 '임시군사주비단' 사건으로 1922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937년까지 무려 16년간의 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신국가건설에 동참해 민중의 발전과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일제강점기 뜻을 같이 했던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광복회'를 재건하고, 대한문관학교설립에도 참여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다. 1955년 3월 3일(음) 대구에서 서거하셨으며, 1967년 현재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하였다.
대구진위대에 입대하여 근무하던 중 정용기를 만나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