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성숙
4월의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선생(金星城)
일제강점기 조국광복을 위해 임정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투사 광복 후 민족주의 실현을 위해 온갖 고초를 겪은 애국지사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세림면에서 김문환과 임천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숙(18983.10~1969.4.12) 선생은 어린시절 발일을 도우며, 한문과 소학교 공부를 하였다.
1916년 양평의용문사에서 불교에 입문하고, 1918년 경기도 광릉에 있는 봉선사 월초(月)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근대 사회과학에는했다. 3.1운동 때에는 양주 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20년에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계기를 이용하여 조직된 합법적 단체인 무산자동맹 노동 공제회에 참석하여 충북 과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의 진상을 서울의 본회 및 각 지방의 지회에 알리는 등 적극적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에서 조국광복운동에 진력을 다하던 중 1923년에는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의 북경으로 건너갔으며, 조선의열단에 가맹하였다. 조선총독 등 일제의 고관 친일파 거두 매국노 등을 암살대상으로 하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 일제 중요기관을 파괴대상으로 삼은 조선의열단에서 그는 승려신문을 벗어나 선전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선생의 활동은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이에졌다. 중국북경에서 광동지역으로 옮아간 선생은 1928년에 중국 전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을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한국인 청년들에게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며 북경 광동 등지를 다니며 무력적인 행동으로서만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할 수 있다며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6년에는 상하이에서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선생은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조선민족전선, 의 편집을 맡았다. 이해 조선민족의용대를 조성하여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1942년에는 임시정부의 내무차장이 되었다.
임정 참여 이래, 1942년 1월 22일선전위원에, 1월 26일에는 3·1절 기념주비위원 에 1943년 3월4일에는 내무부 차장에, 4월 10일에는 선전부 선전위원에, 1944년 4월 24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던 선생은 광복이 되자, 12월 1일 상해를 출발 군산 비행장에 도착하였고 이름날인 2일에는 서울로 들어왔다. 그러나 연말에 접어들면서,
모스크바3상회의 의 신탁통치 결정을 둘러싸고, 한국사회는 찬반의 거센 호오리에 말리면서 해방정국이 좌 · 우 정치세력 간의 대립의 막이 올랐다.
1947년 4월 선생은 근로인민당을 결성하고, 중앙위원에 뽑혔다. 7월 19일여운형이
사망한 뒤에는 조직국장으로 근로인민당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근로인민당은 창당 2개월도 채 인되어 당수를 일었고, 뒤이은 내부갈등으로
결국 1949년 12월 해체되었다.
1950년 6월 25일한국전쟁이 터지자 선생은 미처 피난을 못가고 서울에 남았다. 유가족의 증언에 의하면, 남로당의 거물인 이승엽이 사람을 보내 김성숙에게 협조를 요청하자, 즉각 피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1 - 4후퇴' 시 부산으로 피난 온 선생을 부역' 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1960년 4. 19혁명 후에는 사회대중당에 참여하여 정치위원에 뽑혔다. 또 1961년 2월에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연맹 - 중앙협의회의장단에 선출되기도하였다. 그러나 4개월후 5 - 16 군사쿠테타가 일어남으로써, 정치활동은 금지되었고, 5월 18일부터 혁신계 인사들 대부분이 구속되었고,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4년 신한당 창당에 참여함으로써, 보수정치세력에 합류하였다. 이후선생은 신한당 정무위원을 거쳐 재야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운영위원 · 지도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어느새70세를 넘고 있었고, 남은 건 병고와 가난뿐이었다. 세상을 뜨기 3년 전에아, 동자들의 주선으로 방 한칸을 마련하고는 피우정(通事) 이라 칭하였다. 말년에 약값 마련도에려운 가난에 묻혀, 1969년 4월 12일 오전 10시 눈을 감았다. 선생의 유해는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치른 후, 파주군 묘소에 묻혀 있다가, 2004년에 국립현충원 임정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늦었지만 선생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된 때가 1982년이었다
여러분도 함께 참여함이 어떨까요?
천안 독립 기념관 : 041) 560-0114
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 02) 360-8590 순국선열 유족회 : 02) 365-4388
한말의 독립운동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하여 활약
일제강점기 조국광복을 위해 임정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투사 광복 후 민족주의 실현을 위해 온갖 고초를 겪은 애국지사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세림면에서 김문환과 임천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숙(18983.10~1969.4.12) 선생은 어린시절 발일을 도우며, 한문과 소학교 공부를 하였다.
1916년 양평의용문사에서 불교에 입문하고, 1918년 경기도 광릉에 있는 봉선사 월초(月)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근대 사회과학에는했다. 3.1운동 때에는 양주 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20년에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계기를 이용하여 조직된 합법적 단체인 무산자동맹 노동 공제회에 참석하여 충북 과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의 진상을 서울의 본회 및 각 지방의 지회에 알리는 등 적극적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에서 조국광복운동에 진력을 다하던 중 1923년에는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의 북경으로 건너갔으며, 조선의열단에 가맹하였다. 조선총독 등 일제의 고관 친일파 거두 매국노 등을 암살대상으로 하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 일제 중요기관을 파괴대상으로 삼은 조선의열단에서 그는 승려신문을 벗어나 선전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선생의 활동은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이에졌다. 중국북경에서 광동지역으로 옮아간 선생은 1928년에 중국 전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을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한국인 청년들에게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며 북경 광동 등지를 다니며 무력적인 행동으로서만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할 수 있다며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6년에는 상하이에서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선생은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조선민족전선, 의 편집을 맡았다. 이해 조선민족의용대를 조성하여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1942년에는 임시정부의 내무차장이 되었다.
임정 참여 이래, 1942년 1월 22일선전위원에, 1월 26일에는 3·1절 기념주비위원 에 1943년 3월4일에는 내무부 차장에, 4월 10일에는 선전부 선전위원에, 1944년 4월 24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던 선생은 광복이 되자, 12월 1일 상해를 출발 군산 비행장에 도착하였고 이름날인 2일에는 서울로 들어왔다. 그러나 연말에 접어들면서,
모스크바3상회의 의 신탁통치 결정을 둘러싸고, 한국사회는 찬반의 거센 호오리에 말리면서 해방정국이 좌 · 우 정치세력 간의 대립의 막이 올랐다.
1947년 4월 선생은 근로인민당을 결성하고, 중앙위원에 뽑혔다. 7월 19일여운형이
사망한 뒤에는 조직국장으로 근로인민당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근로인민당은 창당 2개월도 채 인되어 당수를 일었고, 뒤이은 내부갈등으로
결국 1949년 12월 해체되었다.
1950년 6월 25일한국전쟁이 터지자 선생은 미처 피난을 못가고 서울에 남았다. 유가족의 증언에 의하면, 남로당의 거물인 이승엽이 사람을 보내 김성숙에게 협조를 요청하자, 즉각 피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1 - 4후퇴' 시 부산으로 피난 온 선생을 부역' 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1960년 4. 19혁명 후에는 사회대중당에 참여하여 정치위원에 뽑혔다. 또 1961년 2월에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연맹 - 중앙협의회의장단에 선출되기도하였다. 그러나 4개월후 5 - 16 군사쿠테타가 일어남으로써, 정치활동은 금지되었고, 5월 18일부터 혁신계 인사들 대부분이 구속되었고,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4년 신한당 창당에 참여함으로써, 보수정치세력에 합류하였다. 이후선생은 신한당 정무위원을 거쳐 재야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운영위원 · 지도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어느새70세를 넘고 있었고, 남은 건 병고와 가난뿐이었다. 세상을 뜨기 3년 전에아, 동자들의 주선으로 방 한칸을 마련하고는 피우정(通事) 이라 칭하였다. 말년에 약값 마련도에려운 가난에 묻혀, 1969년 4월 12일 오전 10시 눈을 감았다. 선생의 유해는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치른 후, 파주군 묘소에 묻혀 있다가, 2004년에 국립현충원 임정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늦었지만 선생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된 때가 1982년이었다
여러분도 함께 참여함이 어떨까요?
천안 독립 기념관 : 041) 560-0114
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 02) 360-8590 순국선열 유족회 : 02) 365-4388
한말의 독립운동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하여 활약